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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5일 수요일

존재론으로서의 정보윤리


 플로리디는 정보윤리(Information Ethics)라는 이 름하에 정보개념에 입각한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먼저 그의 제안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보윤리의 개념과는 구분되어 야 한다.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의 ‘정보윤리’는 일종의 미시윤리 (micioethics)로서 정보통신기술의 사용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쟁점들을 다루 는 실천 응용윤리 분야를 일컫는 말이다. 가령 명예훼손이나 표절과 같은 인터넷 사용윤리, 지적재산권, 정보격차(digital divide), 해킹, 사생활 침해, 정보의 공공성과 검열, 표현의 자유와 같은 쟁점들이 일반적인 정보윤리의 전형적인 문제들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서 플로리디가 말하는 정보윤리는 특정영역에 한정된 응용윤리의 하나가 아니라, 영역 독립적으로 적용 가능 한 일반적인 기초 이론으로서의 거시윤리(macroethics)에 해당한다. 그가 말 하는 정보윤리는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정보적 성 질이나 구조를 근본적인 범주로 설정하는 존재론적 관점과 맞물려 있으며,  그러한 존재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일반적인 윤리 이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어떤 대상(존재물)이나 과정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적용하 는 개념적 추상화(Level of Abstraction; LoA)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 로 서술되고 규정될 수 있다. 우리는 대상을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 생명의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정보적 관점도 이것 들과 경쟁하는 개념적 프레임이다. 여기서 정보는 단순한 의미의 단위가 아 니라 일종의 존재물(entity)이다. 따라서 정보윤리의 정보는 의미론적 내용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 인식론적 접근의 대상이라기보다, 사물의 근본적 본성 의 분석과 관련된 존재론적 범주의 핵심 개념이다. 정보적 관점에서 대상은 데이터의 묶음(cluster)으로 이해되며, 그것이 갖 는 데이터 구조, 정보적인 특성이나 상태, 상호작용 등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모든 대상은 그것이 갖는 데이터 구조에 의해 그 본성이나 정체성이 결정되는 하나의 정보시스템이다. 정보시스템은 그러한 본성을 기초로, 그 것에 가해지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여 행동하면서 다른 정보적 대상들과 상호작용한다. 정보적인 상호작용에 노출된 모든 정보체계는 행위자(agent) 나 피동자(patient)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둘러싼 환경적인 과정이나 변화 또한 정보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거시윤리로서의 정보윤리는 일종의 생태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정보권(infosphere)이라는 플로리디의 독특한 개념이다. 생물 이 살 수 있는 지구의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이 생물권(biosphere)이라면, 정 보권은 정보적 존재자들이 거주하는 정보적 공간이나 환경을 일컫는 표현 이다. 우리는 흔히 인터넷과 같은 정보공간을 정보권으로 생각하기 쉬우며, 그것이 우리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로리디가 말하는 정보권은 모든 정보시스템들이 그 안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하게 되는 일종의 생태 환경이다.
  플로리디에 따르면, 우리 인간도 정보적 구조로 분 석될 수 있는 정보적 존재자이며, 다른 정보적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정보권 내에 거주하는 다양한 존재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 하는 모든 대상은 모종의 정보시스템으로 환원되어 분석 가능하다. 그럼 점 에서, 거시윤리로서의 정보윤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한 이론이다. 정보 윤리는 대상을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정보권이라 불리는 생태적 환경에 속하는 한 구성원으로 다루며, 정보권의 일원으로서 정보시 스템들이 만들어내는 변화, 행동, 상호작용을 정보적으로 분석한다. 플로리디는 우리가 이러한 정보적 관점을 취할 때, 그로부터 다양한 윤 리적 함축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학으로서의 정보윤리는 존 재 중심적(ontocentric)이고 피동자 지향적인(patient-orinted) 생태적 거시윤리 로 규정된다. 먼저, 존재 중심적 윤리는 생명 중심적 윤리와의 비교를 통해 서 잘 이해될 수 있다. 생명 중심적 윤리는 인간 중심적 윤리와 달리 다른 생명체나 생태체계에도 일종의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며, 이는 생명이 그 자 체로서 갖는 내재적 가치와 고통(suffering)의 부정적 가치에 근거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생명은 상황에 따라 기각 가능(overridable)하지만 최소 한의 존중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행위자가 어떤 윤리 적 판단이나 결정을 하면서 고려해야만 하는 중요한 제약 조건으로 작용한 다. 그런 점에서 이는 피동자 지향적인 윤리이다. 생명 중심의 윤리에서 ‘생명’의 개념을 정보로서의 ‘존재’로 대치하게 되 면 존재 중심의 윤리인 정보윤리로 나아가게 된다. 존재 중심적 윤리에 따 르면, 생명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존재(being)이며, 고통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엔트로피이다. 정보 혹은 존재는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를 가지며, 그런 점에서 존재할 권리를 포함하여 그것의 실존 및 본질을 향상시키고 풍부하게 할 번성의 권리를 갖는다. 이에 반하는 것이 존재의 궁핍화 (impoverishment)를 의미하는 엔트로피로서, 이는 정보 질서나 구조의 붕괴 를 통한 정보적 대상의 파괴나 타락을 야기한다. 도덕적 행위자의 행동은 정보권의 성장에 대한 기여, 즉 엔트로피 수준의 증가 여부나 그 정도에 따 라서 평가될 수 있다.

정보윤리에 따르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도덕적 존재의 범 위는 정보권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의 정보체계로 이해가능한 모든 존재를 포괄하도록 확장된다. 그리고 존재의 표현인 모든 정보적 대상은 내재적 가 치를 가지며, 기각 가능하지만 최소한의 동등한 존중을 받을 자격을 가진 도덕적 피동자(patient)들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도덕적 피동자인 인격체나 동물뿐 아니라, 식물, 자연적 대상, 기술이나 인공물, 추상적인 지 적 대상들도 포함된다. 그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도덕적 피동자로 포 함되는 것이다. 정보윤리의 입장이 고전적인 의미의 생태근본주의와 구분되 는 지점이 바로 기술이나 인공물을 도덕적 피동자로 포함한다는 것이다. 정 보윤리는 가능한 한 비인간중심적이고 중립적인 대상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충족해야 할 최소 자격 요건을 최대로 낮춘 윤리적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보윤리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공평하며 보편적인 이론이라 말할 수 있다. 정보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윤리는 생명이나 살아있는 것에 경도되어 있으며, 생태근본주의는 기술이나 인공물에 대해 편향된 태도를 가지고 있다. 플로리디에 따르면, 도덕적 피동자의 범위를 살아있는 것이나 자연적인 것에 국한시키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나 윤리적 감수성을 반영하는 임의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정보윤리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행위자를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간략히 말해서, 도덕적이라 평가될 수 있는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자율적 존 재는 도덕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여기에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 인공적인 행위자도 포함된다. 동물은 도덕적 판단이나 의도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존 재가 아니므로 지금까지 도덕적 행위자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었다. 자율자 동차와 같은 인공적 행위자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도덕적 책임 (responsibility)을 질 수 있는 존재여야만 도덕적인 행위자로 간주될 수 있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 판단 능력 혹은 의도나 의식과 같은 심성 상태 가 필요하고, 동물이나 로봇은 그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로리디는 도덕적 행위자의 개념을 책임의 개념으로 환원시키는 이런 태도는 결국 인간 중심주의적 도덕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면서, 규범적 담론이나 도덕적 평가에는 행위에 대한 책임 이상의 것이 결부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어떤 도덕 행위자는 비록 책임을 질 수 없다하더라도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인명을 구한 수색구조견을 그러한 사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전통적인 의미로 자신의 행동에 도 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그 개를 도덕 적 귀결을 갖는 행위의 원천으로 확인하고 그것에 대해서 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여기서 플로리디는 책임 개념과 대비하여 책무성 (accountability)의 개념을 도입하고, 수색구조견도 그것이 야기하는 선과 악 에 대해서 책무성을 귀속시킬 수 있는 도덕적 행위자임을 주장한다.

기존의 윤리학은 특정 행위에 대한 처벌과 보상이라는 책임 개념에 입각 한 윤리학이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만이 도덕적 행위자이며,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는 비도덕적(amoral) 행위자라는 이분법이 그로부터 도출된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나쁜 일이 발생하거나 예상될 경우에, 그에 대해 책임 을 질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가 된다. 하 지만 세상에서 선과 악을 유발하는 도덕적 원천은 개인이나 집단으로서의 인간과 같은 전통적인 주체가 아닐 수 있다. 앞서도 잠시 논의했듯이, 우리 는 이미 국지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행위자 사이의 상호작용들이 체계적인 상호작용을 거쳐서 전체나 지구 수준에서 엄청난 해악으로 귀결되는 수많 은 사례들을 대면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 책임의 주체 가 누구인지도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책임의 크기도 미미할 수밖에 없다. 드러난 해악은 명백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분명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은 세상의 많 은 일들이 전통적인 의미로는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도덕 행위자들의 선택 과 행동을 통해서 결정되는 세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져야할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도덕적 행위 능력과 그에 따르는 책무성에 입각하여 규범적 인 행동을 장려하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플로리디는 이제 처벌과 보상에 입각한 윤리학으로부터, (행위가 아닌) 도 덕 행위자 중심의 책무성과 책망(censure)에 입각한 윤리학으로의 전환을 제 안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윤리학에서 우리 인간이 져야할 책임이나 태도는 어떠 한 것인가? 플로리디는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고 인류에게 주어 진 선물로서 우리가 보살필 필요가 있는 것들임을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체 정보권에 대해 에코포이에틱(ecopoietic)한 책임을 지니며, 정보 윤리는 정보권에 속하는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관리할 책무(creative stewardship)의 윤리가 된다. 에코포이에시스(ecopoiesis)는 생태지향적인 관점 에 입각하여 도덕적인 방식으로 환경을 구성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인간의 역할은 호모포이에티쿠스(homo poieticus)로 규정된다. 호모 포이에티쿠스로 서의 인간은 정보권에 속하는 실재(reality)를 보호하고 번성하도록 관리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역할을 떠맡게 되며, 자연자원의 사용자나 착취자로서의 호 모 파베르(homo faber), 부의 생산자, 유통자, 소비자로서의 호모 이코노미쿠 스(homo oeconomicus), 윤리적 배려나 책임감을 결여한 체 놀이에 집중하는 호모 루덴스(home ludens)와 구분된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실재에 개입 하고 그것을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힘(ontic power)은 꾸준히 증가한다. 그럴수록,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호모 포이에티구스는 자신 뿐 아 니라 전체 정보권에 대해 더 많은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 리는 개별적인 행동의 덕성에서 지구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방 향으로 이행해야 하며, 사용자나 소비자가 아니라 창조자, 관리자, 감독자로 서의 책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플로리디의 주장이다.


 - 자율기술과 플로리디의 정보 윤리, 신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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