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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일 목요일

구조자 이론(Constructor Theory) : 데이비드 도이치의 세상을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이론

구조자 이론(Constructor Theory)
: 데이비드 도이치의 세상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이론
http://newspeppermint.com/2015/03/04/m-constructor/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벨랩에서 일했던 클로드 섀넌은 자신의 실제 업적에 비해 덜 알려진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그가 1948년 발표한 정보이론은 디지털 통신을 수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입니다. 휴대폰, 디지털 텔레비젼, 디지털 라디오, 컴퓨터, 인터넷 등 모든 디지털 장치는 그의 정보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섀넌은 21세기 현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정보이론은 오직 고전적인 정보, 0 1로 이루어진 정보에 대한 것입니다. 반면 양자세계에서 입자는 0 1의 값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양자 컴퓨터가 특정 문제에 있어서 기존의 컴퓨터보다 더 강력해질 수 있는 이유이며, 양자 암호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양자세계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보이론이 필요하며, 이 떄문에 일부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이 문제에 골몰해 왔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데이비드 도이치와 키아라 마를레또 역시 이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들은 최근 고전적 정보이론과 양자 정보이론을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이 이론을 구조자(constructor)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론은 양자역학보다 단순하면서 동시에 양자역학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물리법칙들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도이치는 이 구조자 이론이 모든 물리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는 근본 원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조자 이론은 우주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술합니다. 그는 물리학자들은 지금까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초기조건과 운동방정식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 수 없는지를 알려줍니다.
구조자 이론은 이를 반대로 생각합니다. 이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물리법칙 그 자체를 가능한 물리적 변환과 불가능한 물리적 변환들을 이용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물리법칙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에 따라서 물리 법칙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변환이 가능한지, 그리고 어떤 변환이 불가능한지를 생각함으로써 역으로 우리는 물리법칙을 도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구조자 이론이 다른 어떤 물리법칙보다도 더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도이치는 실제로 구조자 이론은 물리법칙이 아니라 물리법칙들이 만족해야할 근본 원리, 그리고 그 근본원리들의 집합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에너지 보존을 예로 들며 이를 설명합니다. 에너지 보존은 양자역학이나 상대론과 같은 물리법칙이 아니라 모든 물리법칙이 만족해야할 원칙입니다. 에너지는 화학에너지, 전기에너지,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의 다양한 형태로 바뀌며 각각의 변환에 있어 서로 다른 물리법칙을 만족하며 변화합니다. 그러나 어떤 변환의 경우에도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원칙은 유지됩니다.
, 에너지 보존 법칙은 운동에 대해 운동 법칙보다 더 상위의 설명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조자 이론도 이와 비슷합니다. “구조자 이론은 물리적 개체의 운동에 대한 법칙이 아니라 그 물리 법칙들이 가져야할 제한조건들에 대한 법칙입니다.” 즉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법칙인 것입니다. (마치그렇습니다. 톨킨이라면 절대반지에 대해 이야기했겠죠.)
이 이론에서는정보가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의 에너지 역할을 합니다. 정보는 빛을 통해, 화학물질을 통해, 전기를 통해, 봉화를 통해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대상은 다른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정보 그 자체는 이들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즉 정보는 매개체들에 대해 독립적입니다. 그러나 정보 역시, 물리법칙과 무관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정보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논문에서 그 법칙이 어떠해야 하는 지 추측했습니다.”
이들이 주목하는 점은 정보는 물리적 환경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절대로 추상적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많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이 가졌던 정보에 대한 접근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보를 물리학에 결합하려는 시도들은 정보를 어떤 수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가정했습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접근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구조자 이론에서 9개의 원칙을 정의했고, 정보에 대해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가능하지 않은지를 적용했습니다. 이 원칙들은 계산, 측정, 그리고 고전적 정보의 개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이치와 마를레또는 어떤 불가능한 정보처리과정과 관련된초정보(superinformation)”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이들은 양자정보의 독특한 특징이 바로 불가능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양자 정보는 초정보의 한 예로 보입니다.”
이들의 접근은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보를 정의하는 것은 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정보이론에서정보(information)”구별가능성(distinguishability)”는 마치 닭과 달걀처럼 서로를 정의했었습니다그러나 구조자 이론에서 정보의 본질은 물리법칙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는 위의 문제를 깔끔하게 회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고전 정보와 양자 정보가 하나의 이론안에서 설명되는 최초의 이론입니다. 이는 떠오르는 분야인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 양자 통신에 있어 이 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구조자 이론이 물리법칙 자체를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이치와 마를레또는 어떤 더 상위이론으로부터 양자역학을 유도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이론의 원칙들이 에너지보존과 배우 비슷하게 작동한다는 점이 이 이론을 상위의 이론으로 여겨지게 만듭니다. 에너지 보존은 모든 물리법칙이 이를 만족한다는 점에서 더 상위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리법칙들 역시 에너지 보존 원칙을 만족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구조자 이론의 원칙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지금까지의 물리법칙들은 이 원칙들을 만족하고 있으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리법칙 역시 구조자 이론의 원칙들을 만족할 거라고 말입니다.
구조자 이론에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 이론이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입니다. 도이치 자신은 이 이론이 세상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가 이 이론을 탐구해야할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다른 이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구조자 이론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려줄 검증가능한 가설 같은 것들 말이지요. 아마 도이치의 이론을 더 많은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다보면 실험가능한 예측이 등장할 것입니다.
물론 물리학자들은 이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이치가 저명한 학자이며 가장 창조적이고 독특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이치는 1980년대부터 양자 컴퓨터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당시 양자역학을 계산에 활용하는 것은 주류 물리학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양자컴퓨터는 물리학 분야 만이 아니라 신기술의 입장에서도 주요한 연구 분야중의 하나입니다그는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과 다중우주 이론에도 참여했습니다. 그 이론 역시 우주론 분야에서 비주류에서 주류로 바뀐 이론입니다. 이는 그의 연구이력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마 구조자 이론 역시 물리학에 있어 더 심오한 결과들을 만들 것이며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여줄 것입니다. 적어도 2001년 세상을 떠난 섀넌이라면, 그의 이론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Physics arXiv)


2015년 9월 15일 화요일

가속주의: 크루즈 컨트롤 Accelerationism: Cruise Control ――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

가속주의: 크루즈 컨트롤
Accelerationism: Cruise Control


01. 가속주의에 관한 대부분의 관념들―찬성과 반대―이 자본주의는 항상 다소간 동일한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자본주의는 자체를 긍정할 수 있는데, 가속되어 미래에 무언가 다른 것이 된다. 또는 그것은 부정되어 무언가 다른 것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자체는 항상 동일한 듯 보인다.

02. 그런데 그러한가? 이것은 여전히 자본주의인가? 그것이 더 나쁜 것이었다면 어쩔 것인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내가 주장한 적이 있듯이, 우리는 상품 경제가 이미 세 단계―토지의 인클로저, 물건의 대량 생산 그리고 정보의 상품화―를 거쳤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단계는 별개의 사적 소유 형태인데, 계급들, 소유자와 비소유자들의 연속적인 양극화를 낳는다.

03. 변형적 가능성들은 소유 형태가 전개되는 각 단계와 더불어 변화한다. 토지 인클로저는 반동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농노 저항을 낳았다. 상품으로서의 물건의 대량 생산은 급진적이면서 개혁주의적인 노동 운동들을 낳았다. 이런 진행 중인 착취 형식들의 꼭대기에 층을 이루는 새로운 착취 형식들은 새로운 종류들의 논쟁과 조정을 낳고 있다.

04. 새로운 상품화 단계는 노동으로부터 잉여 가치를 추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놀이로부터 잉여 정보를 추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정보를 공짜로 제공하지만, 그 대가로 더 많은 정보―잉여 정보―를 추출함으로써 가치를 추출한다.

05. 그런데 이런 새로운 형태의 상품 경제는 도전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대항 흐름들은 '정치'라는 범주로 적절히 포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투쟁은, 보그다노프(Bogdanov)가 말하곤 했듯이, 상품화와 더 나은 조직 형태들의 가능성 사이에 벌어질 것이다. 조직의 문제는 동시에 자원, 기법, 인간 및 비인간의 힘, 정동과 정보에 관한 문제이다.

06. 예전에 대체로 전향적이었던 좌파 담론이 이제는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그것은 자체의 두 번째 10월을 바란다. 또는, 그것은 그리스도-레닌-메시아를 바란다. 그것은 도약과 사건들을 바란다. 어떤 자율적 영역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는 시기에 그것은 정치적 활동의 자율적 영역을 바란다. 조직 양식들의 문제가 다시, 그리고 정치 이론의 영역 바깥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07. 물론 "아무 대안도 없다"는 언어에 대해 굴복하는 비정치적 이론보다 정치적 이론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우리 대안들은 영원한 자본주의에 대한 몰역사적, 철학적 이해들이 아니라, 상품 관계의 현재 형식들에 대한 분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카스토리아디스(Castoriadis)가 상상적 제도―이것으로 조직이 자체의 형태에 함축된 국면 변화들을 찾아낸다―라고 부른 것을 재개해야 한다.

08. 그들이 구사하는 수사법으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요즈음 이야기는 붕괴, 창조, 파괴에 관한 것이다. 아방가르드와 혁명가들의 옛 언어는 이제 실리콘 밸리 홍보 담당자들의 분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언어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이 필요하며, 그리고 새로운 아방가르드가 필요하다. 이것이 자체의 지속 수단을 해체하느라고 바쁜 상품 경제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착상들이 고갈되어 버렸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과업은, 이것이 결국 덜 효율적이고 덜 효과적인 조직 형태들을 초래할지라도, 사회적인 것들이 상품화되도록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더 스쿨에 아이패드를 배치하자! 그 결과는 덜 효과적이고 비용이 더 많이 들 것인데, 그것이 물론 목표이다.

09. 우리 시대의 지배 계급은 지대 추구 계급(rentier class)이다. 그것은 사실상 혁신적이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속화하지 않는다. 기술적 혁신은 상품화를 새로운, 더 추상적인 차원, 즉 정보의 차원으로 밀어붙였다. 그런데 계획은 대체로 그런 영역들에서 유사 독점적인 지대 추구 행동에 밧줄을 쳐서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지배 계급―내가 벡터적 계급(vectorial class)으로 부르는 것―은 정보가 정말로 '혁신'의 양식이 아니라 조직 통제의 양식이기를 바란다.

10. 이런 바로크적 질서에 대한 도전은 더미의 기반에 놓여 있는, 그것이 실존의 물질적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 안에 전적으로 속한다. 부정은 항상 아래에서 비롯된다. 위로부터의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모라에 맞서는 판단을 제공할 절대적 타자성의 다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보편적인 평등성의 보복 천사 같은 코뮨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지의 것을 향한 부조리주의적 도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벡터적 계급에게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의 해체의 체계적 성질이다. 그 목록에서 첫 번째 항목이지만 마지막 항목은 아닌 것은 항상 증가하는 대기중 탄소의 수준이다. 붕괴를 촉발할 것은 철학이나 예술이 아니라 식량 가격의 급등이다.

11. 상품 경제는 자체의 유독한 접촉으로 무엇이든 모든 것을 감염시키는, 알튀세르가 "표현적 총체"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상품 조직 양식과 비상품 조직 양식의 이질적인 혼합물이다. 또한 상품 형식들은 최소한 세 가지의 역사적 형식으로 분화되는데, 토지, 자본 그리고 정보를 사유 재산의 형식으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총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부정도 총체적이지 않다. 이질적인 형식과 목표들을 함께 분명히 표현하는 더 추상적이면서 더 구체적인 조직의 언어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최소한 라클라우(Laclau) 무페(Mouffe) 그리고 스튜어트(Stuart)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12. 가속주의 비판가들은 나 역시 총체적 부정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상 그렇다. 그런데 이것은 드보르(Debord)가 "낙관주의의 어리석은 잡담"이라고 부른 것을 제거하고 전략적 사유의 공간을 개방한다. 조직 사상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질서정연한 퇴각을 조직하는 것이다. 다양한 점에서 지금으로서는 질서정연한 퇴각이 우리의 과업일 것이다. 그것은 유토피아적 상상을 풀어놓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데, 비록 그것이 사도 바울의 절멸시키는 천사들이 아니라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의 퀴어 코스모스일지라도 말이다.

13. 그래서 자격을 갖춘 한 가지 가속주의가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몰역사적이라는 점도 수용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가속화가 실제로 '진보'라는 점도 수용하지 않는 가속주의. 그런데 과거 또는 신비로운 타자를 너무 많이 믿지 않는 가속주의. 난제는 세계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손 닿는 곳에 있는 다양한 하부구조로 더 잘 해내는 것이다.

14. EP 톰슨(Thompson)이 절멸주의(exterminism)라고 부른 것의 언어에는 어떤 매력이 있다. 인간중심적 세계에 관한 추상적 사유로서 이천 년 동안 실패한 이후에 철학은 그 부분을 정말 건너뛰고 인간 없는 세계에 관한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관주의적 철학들이 아니라, 더 말할 것도 없이 철학과 관련되어 있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그렇게 했었을 것이다.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들의 다른 연결망들 속에서 전적으로 다른 종류들의 사유를 조직할 시기이다. 사유의 문제는 조직적 문제이다. 주인 사상가들의 스펙터클을 끝내자.

15. 그렇다면 돌아갈 길은 없다.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를 연결짓는 새로운 시간적 재즈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시간적 재즈를 사유하는 현실의 타자들과 함께 더 다원적인 형식으로 생각하자. 가속주의를 코드보 이슌(Kodwo Eshun)의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베아트리즈 프레치아도(Beatriz Preciado)의 젠더 디엔지니어링(gender de-engineering), 고인이 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의 테크노페미니즘(techno-feminism) 등과 결합하자. 또 다시 계층 구조에서, 그리고 어떤 역사적 레카토 주법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자. 지금까지 어떤 가속주의적 동지들은 차이들로부터 추상하는 어떤 진부한 양식들에 의존했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추상화, 그저 낡은 가부장적 규범들을 단언함으로써 그런 차이들을 없애버리지 않는 추상화가 필요하다. 우리를 위한 미래를 계획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청하는 것은 비행하지 못할 것이다. 낡은 유형의 추상된 합리성에 기반을 둔 대규모의 계획은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부구조가 큰 것들의 작은 그물코가 아니라 작은 것들의 큰 그물코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부구조가 정초하고 있는 반석을 대단히 블안정하게 만들어서 그 반석이 점점 더 붕괴에 취약하게 되었다.

16. 그런데 또 다시 계층 구조에서 생각하라고 요청한다는 점에서 윌리엄스와 스르니체크 같은 가속주의자들은 옳다. 적은 확실히 존재한다. 필립 미로우스키가 우리에게 적의 계획을 제시했다. 첫째, 그것이 먹힐 동안에는 기후 변화의 실재성에 관해 거짓말을 하라. 둘째, 상품 형식을 바꾸지 않은 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탄소 배출권 거래제를 활용하라. 세째, 탄소 배출을 절감하지 않은 채 대기중 탄소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지구공학을 활용하라. 요약하면 적의 계획은 우리를 더욱 더 괴롭히는 것이다. 사유 재산을 위해 그들이 희생시키지 않을 것은 생명 자체를 비롯하여 아무것도 없다.

17. 생명력은 국가의 주요한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 국가는 국민에 맞서 무장하고 있다. 국가는 전 국민에 대한 감시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필요하다면, 국가가 우리에 맞서 재산을 옹호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국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이다. 여러분은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지배 계급은, 조용한 순간들에, 국가가 자체의 과업을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18. 그렇다면 우리의 과업은 가장 힘든 과업이다. 질서정연한 후퇴. 파산 선고를 받고 기력이 떨어진, 상품화에 기반을 둔 이 조직 형식이 내일 사라질지라도, 물질적 실존 조건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대적이다. 과거의 역사적인 갈고리를 원한다면, 그것은 바스티유의 습격이 아니라 모스크바로부터의 퇴각이다. 모든 친프랑스적 행위 이론의 변함없는 중심인 자코뱅적 정치 모형을 끝내자. 프랑스중심적 세계를 고수해야 한다면, 그것과 양쪽 측면을 접하고 있는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나 푸리에를 읽고, 그래서 행위를 상상의 정치적 문제에서 더 하부구조적인 문제들로 옮기자.

19. 우리는 약한 사회적 고리들의 약한 권력 위에 정초할 수 있는가? 추상된 사회성의 권태, 무관심, 불투명함 그리고 양가성이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데이터펑크(datapunk)일 수 있는가? 여기에 삼 기가바이트가 있다, 가서 당신 자신의 사회를 구성하라. 우리는 메타펑크(metapunk)일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메타데이터를 관리하고, 적절한 채널들의 그림자 속에서 횡단적 조직들을 구축할 수 있는가? 우리는 파이프라인 앞에 자기 육체를 내놓을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익명의 지지 집단일 수 있는가? 우리는 인프라펑크(infrapunk), 즉 다른 한 삶의 구조의 작은 조각들의 건설자일 수 있는가? 

20. 우리는 현대 예술과 절연할 수 있는가?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면 행운을 빈다. 우리는 모두 자기 본업이 있다. 우리는 성공적인 예술가를 그저 본업을 갖고 있는 다른 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그의 진짜 일은 무언가 다른 것인지 물을 수 있는가? 우리 시대의 실제 예술은 조직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 제약 속에서 작동하면서 부분적으로 탈상품화하는 자원의 조직들을 제안한다. 현대 예술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여러분이 얻을 수 있다면, 해지 펀드들의 돈을 취하라. 그러나 그들의 가치 감각은 결코 취하지 마라. 우리 모형은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이어야 하는데, 그는 수집가들로부터 돈을 취하여 전후 유럽의 가장 거대한 아방가르드들에 투자했다.

21. 요른이 뒷받침한 아방가르드들은 불안정한 사람들이었다. 여기 지나치게 개발된 세계에서 이것은 이제 일반적인 조건이다. 지배 계급은 지대를 수금하기를 바라지만 어느 누구도 고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평소처럼 운영되는 사업은 실제 노동을 점점 더 적게 필요로 하는 반면에, 탈탄소 생산 양식을 향한 질적인 변화는 수십 년 동안 계속 분주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구조적인 양도를 거의 하지 않는 국가를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지배 계급에 맞서 벌어지는 그런 변화는 많은 구성 요소들의 사회적 운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2. 우리가 당대의 명백한 '정치'을 적절히 명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정치가 아니라 파시스트적 정치이다. 동의는 증오할 외집단을 가리킴으로써만 확보된다. 당대의 공물은 대단히 변변치 않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훨씬 더 나쁜 것을 겪도록 함으로써 유의미한 듯 보이게 될 수 있을 뿐이다. 파시즘에 맞서는 새로운 인민 전선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런 더 큰 운동에서 우리의 위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23. 탈포드주의와 후기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는 현재의 생산 양식에 대한 빈약한 이름이다. 그 이름은 그것의 새로운 특징들이 아니라 한 가지 낡은 특징에 주의를 집중하게 만든다. 그것은 국가의 한 가지 특징만을 적절히 명명할 뿐이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시장을 규율했던 반면에, 현재 신자유주의적 국가를 규율하는 것은 시장이다. 상품 경제의 신흥 형식들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은 신-무엇이거나 탈-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나 인지 자본주의가 아니다. 수식어들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변양태, 즉 정보라는 범주의 역사적 생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을 서술할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언어들을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 동안 동일한 낡은 책들을 읽었다.

24. 하나의 존재론적 실재로서의 정보의 역사적 생산은 냉전의 조직적 난제들의 산물이다. 상이한 생산 양식들을 갖추고 있던 소비에트와 미합중국 둘 다가 그것에 이르렀다는 점은 흥미롭다. 정보의 실재의 역사적 생산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생산 관계들과 독립적이다. 그런데 당분간 다른 한 조직 모형에 대한 약속은 여전히 상품 형식 속에 갇혀 있는데, 그것이 꽤 새롭고 기묘한 상품 형식, 즉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물건의 대량 생산 형식들의 외부에서 이미 조직된 형식일지라도 말이다.


25. 새로운 상품 형식―정보―이 새로운 종류들의 계급 관계를 산출하고 있다. 여기서 아방가르드는 또 다시 입수 가능한 고전적 역할―신흥 계급의 일상 생활 형식들로 실험할―을 찾아낸다. 이제 전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우리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미셀 베른슈타인(Michele Bernstein)와 함께 우리는 "세계의 괴물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세계의 데이터펑크들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잃을 세계가 없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정보혁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

정보혁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
2013년 4월 1일  |  By:   |  IT과학  |  2 Comments
모든 기술적 혁명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정보를 효율적으로 흐르게 할 것인가’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문명이 시작한 이래, 인간은 정보를 쉽게 주고받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지난 50년은 정보혁명의 시대로 불립니다. 정보혁명 시대의 첫번째 혁신은 개인용 컴퓨터 였습니다. 컴퓨터는 정보를 디지털로 저장하고 가공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혁신은 인터넷이었습니다. 인터넷은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들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우편에서 교육에 이르기까지, 정보의 전달에 관련된 모든 인간의 생활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가 그 다음 혁신인지를 다투는 동안, 소셜미디어는 개인 그자체를 정보의 흐름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1997년, 최초의 소셜서비스인 식스디그리닷컴(SixDegrees.com)이 등장했고, 마이스페이스(MySpace), 오르컷(Orkut),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그리고 구글플러스(Google+)가 수억명의 사용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터넷 사용자의 절반 이상이 페이스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역도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소셜서비스는 프로필, 뉴스 전달, 정보의 공유와 같은 거의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고 사람들은 소셜서비스에 쓰는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다음 혁신은 스마트시계와 구글글래스 등의 착용형 컴퓨터(wearable computer)라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은 혁신이라기보다는 기존개념의 확장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보다는 가상세계에 워터쿨러효과(water-cooler effect)를 등장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워터쿨러효과란 사무실 직원들이 정수기 옆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의도치 않은 생각의 발전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소셜 서비스는 가까운 사람들만을 주위에 남김으로써 이러한 우연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이것이 혁신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야후의 CEO인 마리사 메이어가 재택근무를 금지한 것도 이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결정을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고 비난했지만,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때 발생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그녀의 결정은 일리가 있습니다. 아직 어떤 기술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영향은 전 세계적일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모든 국경이 사라질 때 세계의 GDP는 두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제안이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가상세계를 통해 이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야후의 직원들도 다시 집에서 근무할 수 있을것입니다. (Medium)
http://newspeppermint.com/2013/03/31/information/

2014년 8월 28일 목요일

웹이 죽어가고 있다.


“개방적이고평등한웹이죽어가고있다”


웹이 죽어가고 있다.
월드와이드웹이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음이 계속 울리고 있다. 1990년 12월 평등주의를 기초로 탄생한 웹은 점차 덜 개방적이고 폐쇄적인 인터넷의 생태계로 편입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웹의 창시자 팀 버너스 리도 경고 메시지를 더욱 강한 톤으로 내뱉고 있다.
‘가디언’은 8월24일 ‘어떻게 웹은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장문 기사를 내보냈다. 크리스 앤더슨, 찰스 리드비터, 팀 버너스 리의 최근 발언들을 인용해 위기에 처한 웹의 현재를 집중 조명했다. 웹의 개방성, 평등성을 위협하는 다양한 사례도 제시됐다. 하필 그 핵심에 페이스북이 놓여있었다.
팀 버너스 리(출처 : 위키피디아)
팀 버너스 리(출처 : 위키피디아)
1990년 겨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탄생한 월드와이드웹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떤 누구와 언제 어디서든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것이 웹의 정신이었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 정신은 지켜져왔다. 웹의 정신은 풀뿌리에서부터 공감을 얻으며 전 세계로 확장하는 토대가 됐다. 팀 버너스 리는 웹의 성장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동력으로 ‘평등성’을 꼽았다.
“웹은 강력한, 그리고 유비쿼터스적 도구로 진화해왔다. 그것은 평등주의적 조건 위에서 구축됐기 때문이고,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의 부분으로서 수천명의 개인과 대학, 기업이 독립적이면서도 함께 작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디언’은 웹의 평등주의 정신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웹이 가져다줄 긍정적인 미래의 잠재력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고도 했다. 웹에서 여성 혐오주의가 확산되고, 보복성 포르노와 같은 악성 범죄가 늘어나고 있으며 기업과 정부의 감시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를 비롯해 각종 부정적인 글들이 넘쳐나는 현실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고 말한다.
모바일의 확산도 웹엔 위기 요소다. 크리스 앤더슨의 말처럼 “우리는 웹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웹이 개방과 평등을 상징한다면 모바일은 준폐쇄적 인터넷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지닌다. 웹만큼 열려있지 않고 평등하지도 않다. 모바일 시대로의 전환은 웹의 위축을 가져오고 있고, 그러한 경향성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그것이 크리스 앤더슨이 말하는 ‘웹의 죽음’이다.
특히 ‘가디언’은 웹과 페이스북을 대척점에 세워놓았다. 페이스북의 감정조작, 감시 시스템, 광고 모델 등은 웹의 정신과 배치된다는 의미에서다. 런던북리뷰의 편집자인 토마스 존슨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페이스북의 이용자가 아니라 페이스북의 상품일 뿐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웹 창시자마저도 페이스북에 경고
최근에는 팀 버너스 리도 페이스북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그는 인터넷닷오아르지를 추진하고 있는 페이스북을 향해 “페이스북닷컴으로만 가게 하는 휴대폰을 만들 엄두도 내지 마라”고 경고했다. 인터넷닷오아르지는 마크 주커버그가 “연결이 곧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추진 중인 저개발국 인터넷 연결 프로젝트다. 페이스북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통신사들과 협력하고 있다.
현재의 웹은 분명 팀 버너스 리가 의도했던 방향과는 멀어지고 있다. 모든 기술이 설계자의 의도대로 진화하진 않지만, 지금의 웹은 초기의 정신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어 우려를 증폭시킨다. 오죽하면 팀 버너스 리가 “웹이 조지 오웰의 우려 이상으로 감시를 촉진시키는 기술이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을까. 지금 웹이 처한 위기 상황을 대변하는 씁쓸한 풍경이다.
http://www.bloter.net/archives/203986
블로터닷넷 매거진 팀장입니다. 이메일은 dangun76@bloter.net 트위터는 @dangun76 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웹은 죽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웹은 죽지 않았다. 아직은 
“웹은 죽었다”.
‘인터넷에서 작은 수요들이 합쳐 큰 시장을 이루고’, 그것이 아마존 등 소위 웹 2.0 기업의 성공을 도왔다는 ‘롱테일’의 저자 크리스 앤더슨. 그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와이어드’에 지난 8월 17일 위와 같은 도발적 제목의 글을 실었다. 해당 글은 그 제목의 선정성 만큼이나 발표되자 마자 미국 언론계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국내 언론도 이를 소개한 바 있다.
웹이 죽었다는 근거는 1990년대 들어 웹 브라우저 붐을 타고 급상승하던 웹의 트래픽이 2000년대를 지나면서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해 2010년에는 약 23%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개방적이고 평등한 웹이 이제는 모바일, 태블릿 PC 혁명으로 성장한 ‘앱’ 뿐만 아니라 구글, 페이스북 등이 구축하고 있는 자체 콘텐츠 소비 플랫폼에게 인터넷에서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웹’에 대한 ‘앱’의 위협에 앞서 구글, 페이스북 등의 자체 콘텐츠 소비 플랫폼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주장의 배경은 근거리 통신망인 이더넷을 발명한 밥 멧칼프의 ‘멧칼프의 법칙’ 때문이다. 이 법칙은 ‘네트워크의 효용성은 이용자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데, 이 틀에서 보면 네트워크 경제에서 ‘규모의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이용자 수가 2배 많다는 것은, 2배가 아니라 4배 더 가치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구글이 ‘개방’성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오픈’을 독점해 온라인 광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구글의 최대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는 페이스북의 5억 이용자가 갖는 진정한 위력이 무엇인지 이해가 된다.
물론, 여기서 ‘왕의 귀환’에 성공한 스티브 잡스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 PC 대전에서 MS와 IBM의 공동 전선에 밀려 할리우드로 유배당했던 잡스는 그 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의 남과 북,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융합할 수 있는 지혜를 축적했다. 그 내공으로 선보인 것이 전설의 ‘아이’시리즈의 선두를 차지한 ‘아이팟’이었다.
그러나 아이팟으로 MP3 시장을 석권한 신화의 근본은 ‘아이튠즈’에 있었다. 미디어 산업계는 냅스터(Napster), 카자(Kazza) 등 P2P 파일공유 사이트들과의 전쟁에 힘이 빠졌고, 공짜이긴 하지만 질이 떨어지는 자료들 사이를 뒤지고 다녀야 하는 P2P 소비자들이 지쳤다는 것을 잡스가 제대로 읽었기 때문이다. 잡스는 그 사이에서  정보재 거래를 위한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균형점’을 ‘아이튠즈’로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튠즈’ 모델은, 아이폰의 ‘앱스토어’ 모델을 통해서 음반 시장을 넘어 통신 시장으로 확대되었고, 이제는 ‘아이패드’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출판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마찰없는 경제’인 인터넷의 폭팔적 잠재력은 누구나 가늠하고 있었지만, 그 것이 어떻게 기존 산업계를 뒤엎을 ‘파괴적 혁신’으로 등장할 지는 누구도 쉽게 그 답을 내놓지 못했는 데, 그 답을 돌아온 황태자 스티브 잡스가 제시한 것이다.
콘텐츠 공급자에게 던지는 잡스의 충고는 이것이다. “수익성을 원한다면, 이제는 웹을 버리고 앱으로 오라.”
사실 그 선택이 매력적인 것은 이용자도 사실이다. 더 적은 시간을 들여, 더 안전하게, 원하는 기능과 서비스가 충족될 수 있다면, 굳이 앱이 아니라 웹을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웹’이냐 ‘앱’이냐가 아니라 ‘더 큰 효용’이기 때문이다.
수요자와 공급자가 함께 손을 잡고 추는 춤이니, 웹에서 앱으로의 역사적 이동은 환영할 만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먼저 이 이동이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직’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첫째, 앤더슨이 “웹은 죽었다”고 선포한 당일 반박문을 기고한 뉴욕타임즈의 닉 빌톤도 지적한 것처럼, 앤더슨은 통계 자료를 잘못 해석했다. 인터넷 트래픽에서 웹의 비중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 동안 인터넷 전체 ‘이용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그 ‘이용 행태’도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즉, 인터넷 상 웹의 이용 ‘비율’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안 웹의 절대 ‘사용량’도 증가했다는 것이다.
둘째, ‘이용 형태’면에서 볼 때, 잡스가 아이튠즈, 앱스토어 모델을 통해 온라인 정보재 거래의 새로운 경제적 균형점을 만들어 준 덕분으로 P2P에 대한 이용 비율이 감소하긴 하지만, 대신 ‘비디오 이용률’이 급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용자들이 웹보다 앱을 더 이용함에 따라 웹의 영향력이 감소할 것’이라는 앤더슨의 주장에서 맹점을 찾을 수 있다.
그 맹점을 찾기 위해 먼저 이 비디오 콘텐츠 증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앤더슨이 해당  글에서 주요 논거로 사용했던 멧칼프 이론의 창시자 밥 멧칼프는 비디오 콘텐츠가 인터넷에서 공유되는 것을 다음 세기 인터넷의 가장 주요한 변화로 주목한 바 있다.
그 이유는 간명하다. 주로 텍스트 위주의 콘텐츠 공유를 목적으로 하던 인터넷이 기술 혁신에 힘입어 음성을 넘어 이제 비디오를 주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인터넷은 기존의 방송, 음반, 출판 등 콘텐츠 유통망을 모두 통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부각되고 있다. 구글, 애플, 아마존 등이 출판시장이나 TV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것도 이같은 IT와 미디어, 그리고 문화산업을 통합할 인터넷의 잠재성 때문이다.
앤더슨은 또 IT와 미디어, 그리고 문화산업 통합이라는 인터넷의 미래에 대해서 과거 미디어 산업의 공룡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현재 주요한 플랫폼을 쥐고 있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도 동일한 ‘독점적 형태’를 보일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독점적 형태’를 보임에 따라 인터넷은 ‘웹’의 천하통일이 무너지고, 수 개의 플랫폼으로 분할되어 통치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이용자 수에 따라 네트워크의 효용성이 제곱으로 증가한다는 맷칼프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초기 인터넷 제왕이었던 야후 이래 인터넷은 수없이 그 승자를 갈아치워온 날카로운 경쟁의 무대였다. 애플을 제외한 구글, 페이스북 등은 다 인터넷의 새로운 강자들이다. 잡스 이후의 애플,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위협적인 서비스를 내놓지 못한 구글, 끓임없이 새로운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페이스북 역시 미래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전통적인 미디어 산업의 공룡들은 ‘콘텐츠’ 뿐만 아니라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었는 데, 그 플랫폼의 ‘성격’이 다르다.  예컨대, 방송망, 전화망 등은 가입자가 쉽게 이탈할 수 없는 ‘물리적’ 환경이다. 그리고 초기에 그 같은 ‘망’ 구축에 상당한 비용 투자가 요구되기 때문에 자본금이 빈약한 신생기업이 덤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등의 플랫폼 기반이 되는 인터넷은 다르다. 인터넷 위에 또 다른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용자들을 강력하게 구속하기는 어렵다. <인터넷 권력전쟁>(Who Controls the Internet)의 저자이자 콜롬비아 로스쿨 교수인 팀 우가 지적한 것처럼, 인터넷은 초기 인터넷 아버지들의 ‘망 중립성’(Net Neutrality) 원칙에 따라서 ‘모든 콘텐츠를 동일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에 수 억의 이용자를 보유한 온라인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다른 인터넷 서비스가 만들어내는 콘텐츠와 본질적인 차별성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둘째, <인터넷의 미래 그리고 어떻게 그 것을 멈출 것인가>(The Future of the Internent and How to Stop It)의 저자이자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조나단 지트레인이 지적한 것처럼, PC가 인터넷 생태계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인터넷은 과거 미디어의 행태를 답습하기는 어렵다. PC는 일반적 목적(general purpose)에 따른 ‘열린 창조성’(generativity)을 가진 기계이기 때문이다. 즉,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가 분리된 PC는 제품 설계자가 설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킬러 어플리케이션이었던 이메일을 비롯해 웹 등 수많은 기술적, 사회적 혁신이 나올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 PC 기반의 인터넷 생태계가 보존되는 한, 인터넷은 여전히 새로운 미래에 열려 있고, 인터넷의 개방성이 유지되는 한 웹은 다를 것이다.
사실 이러한 특성이, 지난 수 년 동안 인터넷 강자들이 독점적 플랫폼을 만드려는 것을 막아왔다. 구글, 페이스북은 과거의 전기, 수도, 철도와 같은 인프라가 ‘유틸리티’가 된 것 처럼 자신들의 서비스를 유틸리티화함으로써 인터넷 환경에서 자신들의 사업 안정성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전기, 수도, 철도와 IT 인프라가 같을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PC 기반 인터넷 생태계는 ‘이용자 활용력’에 따라 ‘그 응용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틸리티가 되더라도, 그것은 이용자를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용자를 배제할 수 없다면, 그 이용자들이 ‘개방적이고 평등한 웹’을 원하는 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웹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이란 수식어가 필요하다.
웹을 죽이는 방법은 있다. 웹의 지속적 혁신성을 지켜주고 있는 기본 아키텍처의 핵심들을 무너뜨리면 된다. 그리고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먼저 “모든 콘텐츠는 넷상에서 동일하다”는 ‘망중립성’의 원칙을 깨고 인터넷 콘텐츠, 서비스 영역의 강자가 인터넷망을 제공하는 업자들과 거래를 맺는 것이다. 망은 앞서 말한 진입 장벽이 높은 사업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독점 내지 과점 상태다. 미국은 AT&T와 버라이존으로 양분되어 있고, 한국은 KT다. 인터넷 기업이 진정 개방적이고 평등한 웹을 배제한 새로운 플랫폼을 원한다면 망 사업자와의 제휴가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들의 독점력을 빌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구글이 버라이존과 추구한 모바일 웹에 망 중립성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한 바가 있다. 유튜브 콘텐츠의 전송 우선권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 그 복중의 계산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는 지금의 PC 단말기(end-point)가 기반이 된 웹 생태계를 모바일, 태블릿 단말기 기반 생태계 혹은 닫힌(lock-in) 단말기 생태계로 대체하면 된다. 애플의 iOS 진영과 구글의 안드로이드 진영이 맞서고 있는 스마트폰 전쟁의 불이 꺼지지 않고, 아마존의 전자책 판매고가 종이책을 추월하고, 139달러짜리 보급형 킨들을 발표하고, 아이패드가 없어서 못 파는 현상이 지속되면 이 ‘대체의 미래’는 멀지 않은 내일일 것이다. 이것은 IT 인프라가 전기, 수도, 철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할 뿐,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창조’를 해내는 자유를 갖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 플랫폼 안에서도 어느 정도 창조가 이루어질 수는 있으나, 적어도 온라인 상에서는 해당 플랫폼 제공자의 ‘허락’에 따른 ‘제한된 혁신’일 뿐이다.
따라서 웹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앤더슨의 주장은 도발적이었지만, 놓친 것이 많았다. 그는 웹의 이용 비중이 감소하는 것은 제대로 짚었지만, 그 절대적 이용량은 증가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비디오 이용량 증대가 IT와 미디어, 문화산업을 융합하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은 바로 봤지만, 플랫폼 구축을 통한 콘텐츠 소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기반한 플랫폼과 콘텐츠 산업의 수직 통합은 구속력이 약하다는 점을 놓쳤다. 나아가 여전히 ‘열린 창조성’(generativity)이라는 일반적 목적을 위한 단말기인 PC가 웹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있는 한 웹의 기반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아직’일 뿐이다. 망 중립성의 원칙을 위반한 콘텐츠 제공 업체와 망 제공 업체의 결탁은, 새로운 기업이 인터넷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장벽을 높이고 있다. 모바일, 태블릿의 대량 공급과 시장 확대에 의해서 PC 중심 웹 생태계가 닫힌 단말기에 기초한 웹 생태계로 변화하고 있고 IT 인프라는 전기, 수도 등의 인프라와 유사해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 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 인터넷 네트워크의 ‘망 중립성’, 인터넷 단말기의 ‘열린 창조성’(generativity) 등 오늘날 개방적이고 평등한 웹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과 질서를 간과한다면 웹 죽이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는 ‘웹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월드 와이드 웹(WWW)이라는 것은 1990년대에 당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재직하던 팀 버너스 리 경이 인터넷상 문서 공유의 편리를 위해 만든 어플리케이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웹은 ‘망 중립성’과 ‘열린 창조성’의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분리된 PC라는 단말기를 통했기 때문에 팀 버너스 리는 해당 어플리케이션을 ‘허락없이’ 제조할 수 있었다. 또 그 ‘웹’ 자체가 문서의 편집과 공유를 통한 재창조에 ‘아무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 20년 만에 전세계로 확산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열린 창조성’ 원칙의 힘이다.
나아가 인터넷의 모든 콘텐츠는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망 중립성’ 원칙이 웹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기 때문에, 웹은 창조와 혁신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경쟁이 평등한’ 플랫폼이 될 수 있었다. 그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구글, 페이스북 등의 신흥 강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앱이 웹을 죽인다면, 새로운 ‘소비’ 콘텐츠 플랫폼이 웹을 죽인다면, 그 것은 ‘웹의 종말’일 뿐 아니라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지속되어 왔던 ‘개방에 의한 혁신’과 ‘공유에 의한 창조’에 일퇴가 가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바꾸는 것은 웹 이후 새로운 플랫폼일 뿐 아니라, 웹을 통해 부상한 ‘창조의 패러다임’이 ‘소비의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웹이 죽는 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이것은 웹이 죽은 후, 또 다른 웹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애초에 막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 창조성과 망 중립성이 사라진 곳에는, 더 많은 소비를 위한 플랫폼만이 잔존할 뿐이다. 더 많은 개인 정보가 수집되고, 광고 등 상업적 목적을 위해 활용될 뿐이다. 사실, 이 것이 로렌스 레식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코드와 다른 사이버 공간의 법들>(Code and the Other Laws of Cyberspace)에서 지적한 인터넷의 미래였다. 인터넷은 무한한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자유는 ‘코드’라는 ‘아키텍쳐’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으므로, 인터넷을 상업화하려는 세력이 그 ‘코드’를 변경할 경우, 자유는 충분히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이다. 그 같은 ‘자유’는 ‘공기’와 같아서 막상 있을 때는 그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인터넷의, 웹의 ‘자유’를 너무 당연히 생각했기 때문에 그 것이 ‘소비’와 ‘편리’의 이름으로 감소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사라진 후에도, ‘자유’가 극히 감소한 후에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따라서 다시 논의의 핵심은 ‘웹의 죽음’이 아니다. 웹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탄생과 소멸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또다른 웹’이 태어날 생태계가 지금의 환경이냐는 것이다.
아직 웹이 죽지 않았을 때, 인터넷의 개방성이 그 명맥을 유지할 때인 지금이 나의 인터넷을, 웹을 지키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때다.
http://www.bloter.net/archives/37161
  • 기술이라 쓰고 인간이라 읽는 정치학도. 네이버 서비스 자문위원을 맡은 적 있고, 스타트업에서 매니저로 일한 바 있다. 블로터닷넷과 주간경향 등에 IT 칼럼을 기고하고, 쓴 책으로는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 '소셜 웹 혁명','소셜 웹이다'가, 번역한 책으로는 '열린 정부 만들기' 등이 있다. 쓴 글에 대해 더 깊은 논의를 원하시는 분은 visiondesigner21@gmail.com 으로 저자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